2023
글 / 최희승(두산갤러리 큐레이터)
두산인문극장 2023 : Age, Age, Age, 나이, 세대, 시대
눈은 멀고
The Sunken Eyes Were Dim
두산갤러리는 2023년 4월
19일(수)부터
5월 20일(토)까지 두산인문극장 기획전 《눈은 멀고》를 개최한다.
두산인문극장 2023 기획전 《눈은 멀고》는 생명으로 태어났기에 필연적으로 맞이해야만 하는 보편적인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 보는 전시이다.
노화로 인해 신체의 모든 기관이 점진적으로 기능을 잃어가는 상황과 주어진 일상 속에서 아득히 먼 감각으로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은유를 제목에 담았다.
구나, 장서영, 전명은의
작품을 통해 매 순간 초침을 따라 우리를 통과하고 있을 시간을 감각해 보기를 제안한다.
나이를 먹는 일에 대해 자주,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생애 주기의
중간 너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마주친 지인의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급격한 성장을 보았을 때, 언제나처럼 펼쳐본 책의 흐릿한
페이지를 인지했을 때 나이는 불현듯 매우 분명한 것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몸의 변화는 단순히
미적인 부분으로만 침투하지 않으며 신체 곳곳에서 퇴화와 불편함으로, 일상과 생명을 위협하는 크고 작은
질병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간의 많은 일을 기계와 인공지능이 대체하며 노화의 좋은 점을 거의 찾지 못하게
된 오늘날, 구체적으로 다가올 언젠가의 시기를 우리는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할까.
시간은 불가항력적으로 흐르며, 몸을 가진 모든 것들은 현재를 반복해서
갱신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나이 듦을 시간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인류학자인 마르크 오제(Marc Augé)의 말은 유효한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는 『나이
없는 시간(Une ethnologie de soi)』(2014)에서
시간과 나이를 비교하며 ‘나이’는 지나간 나날을 설명하는
방식이며 시간을 단일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제약이지만, ‘시간’은 자유이자 상상력의 원료가 된다고 말한다.[i]
초년-중년-노년의 선형적인
전개에서 벗어나 시간의 속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적응하려는 태도가 나이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역설적으로 나이를 강하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의 방향이 반드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오제의 논리는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구나의 조각은 표면의 무수한 흔적과 색이 처음과 달리
변한 상태, 휘거나 갈라진 부위를 드러냄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인 온몸으로 맞이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견고해 보이는 외형에는 개입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변화무쌍한 표면은 사람의 무른 피부를 떠오르게
한다. 전진하거나 순환하는 시간의 본질을 신체 기능의 상실이나 형태, 특정한 인물이 놓인 상황과 연결시키는 장서영의 영상은, 단단한 벽 대신
얇고 주름진 막을 스크린이자 칸막이 삼으며 제한된 공간에서 희미하게 살아가는
노년의 시간과 멀어져가는 감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명은은 함께 살고 시간을
보내며, 자주 닿고 서로 의지하는 사람과 사람,
크고 작은 동물과 사람,
식물과 물건에 이르기까지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생명이 주고받는 관계를 사진으로 담아낸다.
이때 그의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꿈꾸도록 돕는 연료가 된다.
각각의 작품은 제약과 상상 사이에서 나이가 적지 않은 형상이나 기능이 온전치 못한 상태, 주름 지거나 구겨진 모습 등을 서로 다른 매체로 구현하며 벗어날 수 없는 쇠락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의연하게 자리하는 조각의 몸체들과 여전히 생생하게 숨을 나누며 살아있는 사진 속 생명들, 좁아져 가는 세계를 가진 이가 무한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장면들은 공통적으로 삶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시간을 주어진 한계가 아닌 공평한 흐름이자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눈은 멀고》에서 만나는 작품들을 통해 미래에 우리가 닿게 될 각자의 종점을 당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자연스러운 눈으로 그곳까지의 여정을 그려볼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2022
글 / 박지형(디스위켄드룸 큐레이터)
꿈을 꾸는
나를 바라보는 꿈, 보았다고 믿는 것을 다시 보는 시간
그는 종종 꿈을 꾼다고 했다. 그것이 나에게 다가와 어떤 의미가 되는지 오래도록 곱씹어 본다. 구나는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자국을 남긴 흔적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실천의 연속을 통해 주변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는 한 개인이 마주치는 인물, 사건, 풍경, 언어를 가능한 다층적인, 그리고 편견이 없는 방법으로 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망막과 피부를 통해 경험하는 것들이 진짜 나에게 온 것인지, 혹은 그저
지나치는 도깨비불같은 것인지 의심한다. 또한 동시에 어떤 객체의 외연이 사그라들더라도 모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속성은 어디엔가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매끈한 표면 속의 알맹이라는 것은 실상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애초에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불투명성을 고집스럽게 파헤쳐 가며, 때문에 나는 그의 회화와 조각에서 일종의
강박과 모순을 감지한다.
전시의 제목에 세 번이나 등장하는 꿈은 결코 만져지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현실보다 더욱 진짜처럼 선명하게 느껴지는 허구와 모순의
시공이다. 꿈결을 통해 보는 세상은 몸과 머리로부터 피어오른 무의식의 잔상이므로,
나랑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인지의 영역 밖에 있는 흐릿하고 먼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개인전 《스틸라이프 인 드림드림드림》에서
꿈의 속성을 좇아 형상을 만든다. 이는 단일한 외곽선을 가진 형체를 얻기 보다 저만치 달아나는 그림자를 붙잡고
끌어안으며 비정형의 덩어리를 만져가는 태도로 치환된다. 그가 선택한 장면들은 그가 또렷이 본 것이 아니며,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의, 유리창 뒤의, 등을
돌린 사람의, 혹은 먼 과거에 누군가 그려놓았던, 꿈의 장막 뒤의 것들이다. 말하자면 이는 보았거나 보았다고 믿는 유령과 같은 생명들이다. 이렇듯 밤의
어둠이 지나면 금세 사라질 찰나의 경험을 느릿느릿 되새김질하는 행위는 마치 한 대상을 바라보고 응시하며 그 외형 너머의 것들을 읽어내고자 하는
정물화 그리기의 태도와 겹쳐진다.
그런데 그가 만들어내는 모양들은 꿈에서 본 풍경처럼 테두리가 부정확하고 일그러져 있다. 작가가
끈질기게 붙잡아두었던 객체들은 내용물이 빠져나간 허물처럼, 혹은 속이 비치는 얇은 베일로 만들어진 연약한
존재가 되어 캔버스의 저 먼발치에 서있거나 앉아있다. 바닥에 바짝 달라붙은 창백한 거푸집의 몸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는 세상을 구성하는 밑바탕을 붙잡아두지 못하고 놓쳐버린 것일까? 그것들은
어디로 갔는가? 바로 이 역설적인 교차의 지점에 구나의 세계가 들어선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만나는 표면과 덩어리는 그가 체득한 정보의 근원적인 가치들이 이미지의 껍데기로부터 빠져나와 비가시적인 것이 되어 작가의 몸으로 체화된
이후에 남은 부산물이다. 즉 그리는 것은 보고 느낀 것을 외형적으로 재현하려는 목적보다 내적으로 소화하고
자신의 말초신경 곳곳에 아로새기려는 각인의 과정이다. 요컨대 표현된 것은 그가 채택한 개념 혹은 물자체를
중심으로 상념의 시간을 보내었음을 보여주는 지표에 가깝다. 또한 그는 주로 물감을 아주 묽게 하여 캔버스의
표면을 조금씩 떠 내듯 색을 화면 안으로 밀어 넣거나, 얇은 뼈대 위에 투명하거나 부서지기 쉬운 재료들을
쌓아 올려 작품을 완성한다. 그가 고수하는 제작 방식 역시 작가가 완결된 형태의 단일성보다 이를 구성하는
세포와 같은 단위를 인식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번역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폴 세잔이 그렸던
일그러진 사과의 의미를 떠올려본다. 중요한 것은 외형 자체의 명료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다. 겉보기에 깨진 유리처럼 갈기갈기 부서진 구나의 그림과 조각들은 결코 약하거나 공허하지 않다. 도리어 현현하는 희미한 이미지는 그 이면을 지탱하는 촘촘하고 억센 시간의 중첩과 사유의 깊이를 역설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우리는 본다는 것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불확실한 행위인지 잊곤 한다. 도시, 인터넷, 텔레비전, 꿈에서 곁눈질로 목격한
것들은 곧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내가 보는 것이 주체의 독립적인 인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혹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간접적으로 얻게 된 것인지 끝없이 혼동한다. 그러나 구나는 흔들리면서도 끊임없이 외부의
혼재된 자극들로부터 스스로의 지각을 분리시키며, 그가 가지고 있는 감각의 채로 걸러낸 순수한 이미지들을 엮어
주름진 풍경을 완성해간다. 이러한 거리 두기를 거쳐 태어난 형상들은 서로 다변적으로 연합하며, 이곳에서 관객과 작가 모두에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자각몽과 같은 무대를 마련한다.
2021
글 / 콘노 유키 (미술비평가)
닫힌 시야를 들여다보고 다시 물러서는 일
구나 «너와나와너와나»(갤러리기체, 2019.10.31-11.13)
화이트블랙돌사이베이지오렌지두눈을 마주한다.
눈 그늘 아래 오렌지살구햇빛주름으로 시선을 흘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는 물빛얼굴이 된다.
문득 병상위에벽지가 우리의 얼굴과도 같았던 것 같다.
우리는 브라운그레이블루천과 한 몸과도 같이 포옹을 한다.
에머랄드베이지죽음... 꿈을 이어나가야지.
넘실거리는 화이트에머랄드블루바다, 바닷물과 포말이 흐려지고 다시금 선명해진다.
입에 담긴 잿빛오렌지올리브굴, 서둘러 삼켜야할까.
우리는 예전보다 조금 휘어진 하얀뼈로 착장한다.
바닷물과 포말이 또다시 흐려지다 선명해질 즈음 뼛조각으로 변신을 이룬다.
‘다시 두 눈을 마주하자.’ 눈을 깜빡, 돌아갈 주소를 떠올리며 동시에 지워나간다.
구나 작가 작업노트 中
갤러리기체에서 열린 구나의 개인전 «너와나와너와나»(2019)는 전시장에 전개된 페인팅과 오브제를 볼 수 있으며, 작품은 이때 전시 공간에서 공명한다. 파도와 천의 물결, 인물과 두상이 그렇듯이 재현한 대상과 재료는 각기 다르면서도 서로 유사한 지점이 드리워진다.
작품 사이의 공명뿐만 아니라 전시에서 함께 선보여진 작가 노트를 읽어보면 글과 전시 사이의 공명 또한 느낄 수 있다. 작가 노트를 따라 읽어보면 작품의 모티프를 파악할 수 있다. 문장 중에 강조된 언어―단어나 표현 대신 언어라고 한 이유는 나중에 밝히겠다―는 대상의 색이나 형상을 대변하며 글과 작품을 시각적으로 대응해볼 수 있다. 그런데 강조된 언어 중의 하나는 유독 개념적이다. 심지어 마지막 문장에 들어갔는데, ‘돌아갈 주소’라는 언어는 작품 <화이트 본 프롬 어드레스>(2019)에서 다뤄진 소재이자 동시에 전시에서 핵심적이다. 그 언어는 전시에서 다루어지고 표현된 한때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활성화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 노트에 표현된 한때의 이미지―뼈, 죽음, 포말―는 시간이 지났거나 경과하는 의미가 함축된 모티프들이다. 이 모티프들의 의미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작품은 한때의 이미지 그 자체로 출현하기도 한다. 한 송이 대신 알 하나 있는 포도알(<포도>), 견고한 두상에 드리운 그림자(<권진규의 스카프를 맨 여인>), 긁혔거나 덜 칠해진 자국이 군데군데 보이는 형상물(전시 공간 입구에서 안쪽으로 뻗은 ‘휘어진 척추’)가 그렇듯이, 한때의 이미지는 함축된 의미이자 동시에 그 작품에 시각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모티프의 의미와 시각 표현 사이의 공명을 통해 작품은 한때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돌아갈 주소라는 언어는 한때의 이미지를 어떻게 활성화하는가. 출현과 소멸의 과정에서, 그 간극이 근원으로 수렴될 일 없이 잠시 이어지고 다시 떨어지는 동력을 받아 활성화된다. 돌아갈 주소는 명시된 위치로 향할 수는 있지만, 시공간적인 현재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주소, 이제는 이미지가 한때의 것으로 남아있는 그곳은, 실제 시공간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이나 마음속에서만 돌아갈 수 있다. 시간적 흐름의 전과 후의 분기점으로 세워진 이 주소는, 전시에서 (전시 소개 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모호함 내지 불연속”의 표현을 핵심적으로 포착한 언어이다. 그러나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불연속과 모호함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이면서도, 이번 전시에서 경계면을 타듯이 이어진다. 모호함이 어떤 경계가 흐릿한 즉 연속적인 반면, 불연속은 개별적으로 흩어진 상태이다. 대상의 사실성과 의미의 특정 소재지에 국한되지 않다는 의미에서, ‘언어’라는 말을 쓰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의 시작에서 등장하는 작품 <화이트블랙돌사이베이지오렌지두눈>에서 우리는 두 눈을 보게 되며, 두 눈은 마지막 글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이 선명한 눈의 존재감은 다른 작품―<엔젤>(2018), <너와나와너와나>(2019), <권진규의 스카프를 맨 여인>(2019)―에서 눈이 감기거나 그림자가 드리워진 표현과 대조적이다. 그런데 <화이트블랙돌사이베이지오렌지두눈>(2019)을 다시 보면 우리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관람자를 응시하는 눈의 주체는 눈만 선명해서 눈 또는 얼굴만 남기고 모습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설령 얼굴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림에서 깊이감과 공간감은 페인팅 하단은 (<권진규의 스카프를 맨 여인>의 구성과 같이) 제한적으로 보여서 눈의 정체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깊이감과 공간감이 제한된 공간에서 등장한 눈은 마치 창이나 장막을 찢어 누군가가 내부로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눈은 돌아갈 주소, 더 정확히 말하면 시공간의 현재적 부재와 현위치, 그리고 그것에 연루된 이미지―기억, 추억, 과거의 장면을 가시성과 불가시성의 시차적 응답으로 이끄는 존재이다.
한때의 이미지는 우리의 내면으로 시선을 보내게 되면서 상기라는 행위를 한때의 이미지 이름으로 활성화한다. 작품에서 응시하는 두 눈은 그 눈을 가진 존재만큼이나 우리를 이곳-다른 곳에 이끈다. 한때의 이미지는 작품에서 소멸과 출현하는 모티프이자 동시에 시각화하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 또한 한때의 이미지가 되도록 한다―우리는 돌아갈 주소에 다다르고 떠나기를, 그 사이의 간극을 오간다. 사실 돌아갈 주소(지)는 작품 <화이트 본 프롬 어드레스>(2019)에서 적혀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편지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중국어가 쓰여 있는, 뒤집힌 (외국인 체류 비자 확인용 서류로 추정되는) 우편물 외 종이들과 게의 박제 등등, 어떤 인연으로 올려졌는지도 모르는 찢어진 평면이다. 한때의 이미지는 의미적으로, 시각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특정 소재지 없이 연루되고 전개되는 이미지로서 있게 된다―그 중심에는 돌아갈 주소, 즉 본원적인 회귀가 아닌, 시차적 반응이 있다.
작가 노트에서 글의 시작과 끝은 분명 존재하지만, 읽고 나서 다시 시작에서 언급된 작품으로 돌아가는 구성은 시차적 반응과 시차의 분기점이 모호함과 불연속이 경계면을 타듯 이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거품의 일고 사라짐과도 같다. 한때의 이미지란 대상의 엄밀한 부재도 아니고 지금 눈앞에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개와 후퇴를 반복하는 분기점, 바꿔 말해 생기의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 그 결과이다. 글을 포함해, 전시는 눈을 뜨지 못하고 못 보는 일과 눈을 감고 보는 일 사이에서 깜빡거린다―그 깜빡거림에 우리는 순간적으로 돌아갈 주소를 떠올리고 동시에 지워나간다. 전시 «너와나와너와나»는 직접적으로는 화석 같은 물질인 ‘화이트 본’에 대한, 간접적으로는 탈색된 장면, 지금 이곳에 침투하는 다른 시공간의 일들, 감은 눈으로 재차 떠올려‘보는’ 화석적 생각을 다룬다.
2021
글 / 조재연 (미술비평가)
불을 꺼 잠에서 깨는 일
_박지형: 멀고도 먼
1
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밤, 밤으로 가야 한다. 감각할 수 없었던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둠 안에 있다. 우리는 형편에 따라 필요했던 일종의 것들을 빛을 통해 알아채 왔을 테지만, 형편에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빛은 어떤 시간이 흘러도 은닉이나 유예도 없이, 외려 은닉이나 유예를 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무지를 유지시켰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면 빛은 어떤 것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빛은 이것에 합의를 초과한 어떤 사용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지나왔던 대로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양초란 그저 실내에 있어야 한다거나, 교통 공간은 교통 공간일 뿐이니 이곳으로 집단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고 전하는 일은 모두 빛으로 부터의 식별에서 야기된다. 그러나 불을 꺼 눈을 잃자, 부딪치지 않던 것들과 부닥치게 된다. 거닐지 않을 곳에서 걷게 되고, 붙잡지 않을 것을 붙잡게 된다. 은밀해지려는 부빔은 이제 가능하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
지 내 사람아.
감각이 사유를 이행하는 형식으로서 '경험'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감각이 감각으로 지각이 지각으로 머물거나, 행여 더 나아간다 하더라도 느낌에 그칠 때, 현실은 손 틈새로 얄궂이 흘러나간다. 그리고 이 유실은 현실을 사유에서 누락시키는 것 이외에도, 그것을 움키고 흔들 수 있는 역량조차 잠잠히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에는 늘 그 사물이 정해진(합의된) 대로 보도록 만드는 주관적 매개가 관여하고 있다. 어떤 사물이 양초로 식별된다는 것은 그 사물을 '양초처럼' 보도록 만드는 시각 체제가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운동적 의미의— 사유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주어진 것으로, 의식도 과정도 없는 오직 이들의 부재'로써'만 행위하게 만든다. 반대로 사유로 이행되기 위해서 경험은 여기에 관여하는 빛을 거두는 외도外道를 경유해야만 한다. 프레임 내부가 아닌 바깥을 증
명하는, 시간을 당기는, 그리고 기어코 세계를 부정하는 외도. 이 모든 외도들은 빛을 거역拒逆하는 외부, '어둠'에 의탁하고 있다. '멀고도 먼' 어둠이 발자욱을 지우니. 다른 곳으로 걷겠다.
2
모든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된 현실을, 도리어 모든 답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려 버리는 것. ⟪멀고도 먼⟫(온수공간, 21.01.30.-03.03.)은 그렇게 나서는 기획이다. 현명한 이들은 객관적인 정의(답)란 항상 어려운 일이며 불가능하다고 전한다.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고답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라는 성찰의 지점까지 미루어 나아간다면, 답은 윤리마저 쥐게 된다. 그러나 두려운 일은 이 현명한 답을 종착지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그저 정박하는 데서 야기된다. 그로부터 우리가 움킬 수 있는 것은 경험이 부재하는 상황과, 분실한 현실이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니 이 답이 지니는 가치는 불가능이 종착지가 아니라, 외려 기항지寄航地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빛나게 된다. 원근법이든 사진이었든 그 이상의 어떤 기술의 발명도 갈망하던 실재를 귀환시키자마자, 결국 —그러한 성취마저도— 실재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동시에 증명하고 만다. 그러나 이 모순만이 예술이 이제는 끝났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곧바로 다시 예술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든다.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소의의 <낭독하는 이름>은 여행 중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의 담화를 영상으로 다룬다. 그들은 모두 여행의 이유를 묻거나 답하고, 그 내역은 지루함, 막막함, 잊기 위함으로 간추려진다. 그러나 이 내역은 물음에 대한 답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도 해명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지루함과 막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기억을 잊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갖고 있지만, 이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서술하지 못하고 결국 "저는 모르겠어요"나 "아무 일도 없었어요"라는 말로써 그치고 만다. 이는 결국 사유로 이행되지 못하는 '느낌'의 앙상한 처지를 확인시킨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식 없이 빛으로 선별된 색의 공간과, 그 공간이 제공했던 경험 없는 일상에 대하여 한사코 이별을 고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로 가는 그들의 색은 산뜻함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흑백. 이 색 없음은 기존에 의식 없이 감각에 주어졌던 수동적인 색감과는 이별하겠다는 여행주체의 의지다.
그러니 이소의의 <낭독하는 이름>이 알리는 것은 이런 것이다. 빛이 만든 유색有色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는 일, 즉 느낌을 초과해 경험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은 그토록 가시적인 것을 분실해버리는 경험이라는 것.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일은 이러한 사건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이다. 전시의 후반부에 배치된 <낭독의 이름>이 가장 먼저 서술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대로 큐레이팅의 서사는 어둠이 성취한 결과에서 어둠의 시작점을 향하는 것으로서 어둠의 역량을 증빙한다. 그리고 이 역순행적 전개는, 전시가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만든다.— 사유로 이행되는 경험은 먼저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행해진다. 이는 더는 의식 없이 혹은 주어진대로 세계를 경험하지 않겠다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최초의 선언이다. 영상에서 연우는 이렇게 말한다. "다 잊었는데도 못 돌아가고 있네요. 안 돌아가는 거겠죠. 돌아가도 외국인처럼 살 것 같아요." 어둠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연우의 말을 차미혜의 <공중 조각>이 잇는다.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이 없어지고/돌아서면 다음으로 연결되고/쥐었던 것과 놓았던 것은 어느새 달라져 있어" 외국인처럼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할 테다. <낭독하는 이름>이 빛으로부터 이별을 고하고 어둠에 진입하는 어떤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면, <공중 조각>은 이후에 조우하게 되는 낯선 세계에 대한 경험이 담겨있다. 영상작업인 <공중 조각>은 화면에서 이미지나 문장을 슬라이드한다. 초반부에 흑백조로 된 이미지가 후반부에 검은
바탕 뚫어내고 색을 지닌 형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가시적인 것의 분실을 자처했다가 비가시적인 것을 다시 가시화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잡아당기는 담화에 가까운 독백이다. 발화는 청자를 전제한 대화체로 전개되지만, 단 한 명의 화자로 이루어지는 이 독백은 주체에게 의식, 사유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화자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고 있다. 다만 '스스로'는 화자와 더는 동일시되지 않는다. '스스로'는 이제 대상화(객관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대상인 '스스로'는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화자가 '스스로'에게 말 건넴은 세계를 향한 말 건넴으로 연역된다.
자아 내부의 느낌만을 지닌 존재는 그것을 언어로써 외부에 옮길 수 없기에 세계 앞에서 말을 잃었다. 그러나 빛을 잃어 어둠에 잠기는 것을 통해서, 사유로 이행되는 경험을 통해서 말을 되찾는다. 그러나 되찾은 것이 말만은 아니다. 외려 되찾게 된 것은 세계 그 자체다. 그때 세계는 더는 이전과 같이 경험되지 않는다. 일관된 언어. 그렇기 때문에 타당한 언어는 —총체적으로— 세계를 상대하지 못한다. '물이 흐른다'거나 '돌이 단단하다'는 일관된 진술은 주어진 사태를 동어반복적으로 서술할 뿐, 그 안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모순된 언어는 세계 전부를 총체적으로 포함시킨다. 작업이 물과 돌을 경험하며 "움직이는 것과/정지한 것과/단단한 것과/바스러지는 것이/거의 함께해"라고 할 때, 그것은 서로 배제하는 것들을 모조리 형용하기 때문에 어떤 물도, 어떤 돌도 그 전부를 지시해버린다. A와 ~A가 동시에 참인 것으로 사유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 그렇게 가능한 모든 테제와 안티 테제의 통일이 사유되는 것. 어둠만이 총체성을 향한 관점을 주었다는 것을 차미혜는 알고 있다. 어둠에서 우리는 돌멩이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어떤 전체의 일부인지를 사유하고, 그 하나만으로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모순된 언어로 발화하는 존재는 불화를 야기한다. 이때의 불화는 모순된 언어와 타당하고 일관된 언어 사이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불화는 외려 모순된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더 나아가 모순된 언어가 인간의 언어가 아닌 노이즈에 불과하는 것으로 여겨짐으로써 발생한다. 플라톤의 경우 빛을 보고 동굴로 돌아온 존재가 겪는 불화지만, 여기선 빛에 눈 먼자들에게로 돌아온 어둠을 감각하는 자가 일으키는 불화다. 이민지의 <터널링>에 담긴, 링크는 열렸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편지, 그럼에도 수신자를 찾아 세계를 맴도는 편지는 링크 주소의 부정확함이나 수신자의 부재 때문에 열람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허큘리스 대성단에 도착할 예정인 아레시보 천문대의 콘택트콜이 외계의 수신을 이루지 못하는 것 역시 기술의 결핍은 아닐 테다. 두 수취인불명의 메시지는 모두 모순된 언어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이 미열람들은 그것이 편지 자체로, 즉 언어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으로 수신되지 못했다. 메시지들은 모순된 언어를 앞서 터득한 이가 보낸 것이다. 그리고 <터널링>이 비로소 메시지들을 읽으려 할 때, 내용들은 과거에서 온 것이지만, 외려 미래를 복귀시킨다.
영상은 구글 어스와 라이브 캠을 통해 메시지의 발신자 K가 경험했을지도 모를 장면을 좇는다. 과거의 장소, 풍경을 담은 장면들은 —최근에 건축되었기에— 현재에는 존재하지만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 혹은 —최근에 철거되었기에— 과거에는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부재한 것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즉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부정하는 이 부재 때문에 미래는 상기된다. 다만 이때의 미래는 단순히 시간이 흐름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당도하게 되는 산술적 개념은 아니다. 미래는 도리어 늘 같은 것(자본주의, 대의민주주의, 동시대예술, 상대주의 등)을 반복하는 현재를 부정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지양止揚적 개념이다. (즉 시간이 흘러도 변화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늘 똑같은 '오늘'에 불과하다) 현재라는 시간은 완고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가멸可滅멸적인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이 가멸은 미래의 침략으로부터 이뤄진다는 것. 오랫동안 잊어왔던 미래의 침공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어둠은 더 이상 빛의 농도가 약해짐으로써 저절로 존재하는 의존적 개념이 아니다. 어둠은 도리어 빛을 침략하고 갉아먹는 변화란 모르는 것들에 질색하는 독립된 주체다.
박남수의 「아침 이미지壹」 만큼 어둠의 권능과 역량에 대해서 주목한 시가 있었을까. 여기서어둠이 무려 "온갖 물상物象"을 출생시킬 동안 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는 결국 어둠이 아침에 이르러 " 스스로 땅 위에 굴복한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로서 굴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둠이 발견한 모순된 언어로 된 새 진리는 결국 어느샌가 일관된 언어의 지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간의 새진리들이 모두 그랬듯. 그러나 그것이 굴복이되 패배일 수 없는 연유는 이제 세계는 고작 현재, 오늘, 지금의 세계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불가역적인 일이다. 이전으로는 결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다. 구나의 작업이 어둠을 매개로 삼고 있는 전시에서 유독 환하게 드러나는 까닭은 그의 작업이 유독 다른 시간대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구나의 작업은 어둠이 헤집어 놓은 세계의 '이후',
즉 미래에 있다. 전시가 이제껏 어둠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이소의), 어둠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차미혜), 어둠이 빛의 세계를 어떻게 침략하는지(이민지)를 통해서 어둠을 전개했다면 구나는 그렇게 완결된 어둠이 어떤 권능과 역량을 지녔는지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낮잠 그릇>은 '낮잠'이라는, 빛으로는 가시화될 수 없었던 무형의 상태를 가시화한다. 이때 낮잠은 결코 시시한 개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노동자는 감히 쥐어본 적 없는, 소유할 수도 향유할 수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인간만 볼 수 있었던 낮잠이 미래의 시간대에서 모두를 향해 마침내 드러난다. 이 낮잠의 표현은 해방된 시간의 원초적인 상징이다. 그리고 어둠의 가시화는 빛의 가시화와는 철저히 다른 방식을 따른다. 빛이 어떤 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을때, 어둠은 그 표현이 결국 훼손이 될까 두려워 진실을 '은닉'함으로써 보존하려 한다. 작업이 '낮잠'이 아니라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인 연유는 어둠이 새 감각을, 신세계를 출생시키고도 동시에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오렌지살구햇빛구름>과 <화이트화이트블루스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릇이다. 캔버스 속의 분할되고 연속된 각각의 면들은 투명히 빈 내부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채워질 그리고 다시 비워질 빈 것이 있어 이 안으로 사유가 그리하여 경험이 오래도록 보존될 것이다.
3
한 번만이라도 밤을 새워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빛을 편드는 무리는 어둠이 작고 낮은 것들을 두렵게 만든다고들 하지만, 사실 어둠만이 이 미미한 것들을 위해 있는 미려한 시간이라는 것을. 오직 이 안에서만 샘은 더 또렷이 흐르고, 작은 별들은 간신히 스스로를 드러낸다. 나뭇가지와 풀잎이 마음 놓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풀벌레들이 애틋하게 지저귈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시간뿐이다. 그늘로 자욱한 여기의 고독과 적막은 모두 낮고 작은 것들을 위해 있다. 박지형은 전시 서문 말미에 "어쩌면 이 전시는 탐조등이 보내는 작은 신호와 같은 것이길 바라본다"고 적을 때, 작은 신호는 그것이 나약하기 때문에 작은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을 위한 신호이기 때문에 작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 탐조등은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풀벌레들이 불빛 아래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는 것이 혼자만이 아님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있다. 그러니 너라도 이 어둠에 남아주었으면.
⟪멀고도 먼⟫. 빛으로부터 멀고도 먼 이곳은 마찬가지로 과거로부터 멀고도 멀기에, 미래와 가장 가까운 처소다. 어둠은 눈을 감기 위한 시간이기보다는 눈을 문질러 감각하기 위한 시간이어야 했다. 비평은 이미지로부터 눈을 거두어 미미한 텍스트에 의탁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외면이기보다는 이미지를 늘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빛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것임을, 이미지는 알아주기를 늘 바랐다. 그러나 이 어둠이 행여 그의 무언가를 가릴까 두려울 때면 언제나 떨며 쓸 수밖에 없었다. 흰 종이 위에 검은 텍스트를 붑는다는 것은 빛 위에 어둠을 붑는 일과 같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예술에 대한 어떤 불가능이 숱하게 선언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기쁠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도리어 슬퍼할 일이 남아있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려 한다. 어둠이 "상징적인 제약이면서도 무한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라는 박지형의 말은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지 내 사람아.
참조
박남수, 「아침 이미지 壹」, 『박남수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박지형, 「불가해한(fathomless) 질문과 선택적 사유들」, ⟪멀고도 먼⟫ 전시서문, 2021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현실문화A, 2018
보리스 그로이스, 김수환 옮김, 『코뮤니스트 후기』, 문학과 지성사, 2017
알퐁스 도데, 최복현 옮김, 『별』, 인디북, 2008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주형일 옮김,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 『인민이란 무엇인가』, 2016
2020
글 / 정현(미술비평, 인하대교수)
“경험하는 사람은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경험을 실로 그 사람 안에 있으며 그와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 마틴 부버, 나와 너, 9쪽
구나는 말수가 적은 작가다. 그는 작업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주저한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는 확신하는 자신을 의심하기에 주저한다. 작업은 침묵에 더 가깝다. 심지어 전시에 대한 단서도 매우 제한적이다. 쌍둥이의 목차는 마치 베일에 싸인 어떤 인물-들을 추적하는 느낌을 준다. 관람자는 최소한의 힌트를 토대로 작업 사이를 더듬거릴 뿐이다. 나는 그의 작업을 본다는 표현보다 읽다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현대미술은 당연히 독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의 ‘읽다’란 구나의 작업은 조형적 어휘를 통하여 문학적 정서를 끌어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작업의 표제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낱말과 문장 들은 보는 행위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영감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인색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만큼이나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테이블, 센티멘털 로그인”(2020)은 부재와 기억에 관한 작업이다. 그 기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찾는 건 작업을 마주한 각자의 몫이다. 누구라도 낡은 테이블을 만지면서 이제는 부재하는 과거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구나의 테이블, 기능은 사라지고 기표와 언어만 남겨진 앙상한 테이블에 접속해보자. 우연히 기억과 접속하는 날이면 예기치 못한 사람, 냄새, 풍경, 소리가 불현듯 엄습한다.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후가 될 것이다. 여간 말수가 적은 작가와 달리 그의 작업은 관람자의 배회를 허용한다. 여기 납작한 비정형적인 두 개의 판이 서로 기댄 상태에서 한쪽 판 사이로 불쑥 코처럼 보이는 판이 불쑥 솟아있는 작업이 있다. 김현의 시에서 발췌한 문장을 표제로 사용한 “너의 등으로 내 얼굴이 쑥 들어갔다”(김현, 기화, 입술을 열면, 창비, 2018)라는 작업이다. 김현의 시 “기화”는 보이지 않는 따뜻함이 어떻게 영혼을 어루만지는지를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그저 추상적인 형태로만 머물던 이 작업이 표제를 만나자 불현 듯 타인의 진심이 나의 영혼을 흔들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기억을 불러온다. 납작한 세계가 서로 얽힌 모습에 문장이 닿자 어렴풋이 관능적인 이미지가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삶이란 평생 자신의 생각과 행동 사이의 오차를 줄여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말과 글, 생각과 행동,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말이다. 문명화 된 인류는 태어날 미래 세대에게 훈육을 용인했고 문명이 심화될수록 훈육의 강도도 덩달아 강화되었다. 이것이 푸코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과거를 되돌아본 이유였고 데리다가 한 개인이 자신과 무관한 오랜 역사와 관습으로 재단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까닭이었다. 구나의 작업은 보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불확실하고 심지어 비자율적인 인간의 지각을 의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시 <쌍둥이의 목차>는 이런 실존의 고민을 품고 있다. 특히 일란성 쌍둥이에게 실존이란 하나가 곧 둘이자 둘이 하나인 삶을 살게 된다. 형제는 당연히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기 마련이지만 쌍둥이처럼 외모가 동일한 쌍둥이 형제는 외모, 목소리, 말투, 걸음걸이, 성격의 동일함 혹은 오차는 개인의 내면보다 더 우선적으로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외형상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른 존재인 쌍둥이는 상호참조적 존재로 하나는 다른 하나와 비교되면서 둘은 마치 하나처럼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워홀이 프린팅한 마릴린 먼로는 동일한 원본을 참조하여 복제되었다. 원본에서 파생된 시뮬라크르는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원본은 복제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쌍둥이는 서로 매우 닮아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에 그들은 각자 원본이지만 동시에 비교 대상이 된다. 그들은 평생 비슷한 것과 다른 것을 비교 받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외형적 기준, 외모와 음성의 유사성을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어떨까?
쌍둥이의 목차는 말과 사물의 관계처럼 의도적으로 운명적 끈을 엮어놓은 문화의 틀을 벗어난다. 그것은 구나의 작업이 애초부터 던진 질문이다. 구나는 이번 전시에서 닮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쌍둥이라는 표상은 눈요깃감으로 신화로 지나치게 소비되었다. 닮음이란 서로의 존재가 이미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래서 구나는 닮음보다 서로가 맺는 관계에 집중하고자 한다. 쌍둥이의 목차는 잘 알려진 쌍둥이의 전형을 반복하지 않는다. 여기서 쌍둥이는 소울메이트, 도반, 나와 너 혹은 타자이기에. 이미 만들어진 세계의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서 형성되는 유연하면서도 감각적인 관계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볼 수 있겠다. 이 관계는 두 존재, 연인, 우정, 형제를 아우른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지난 해 개인전 <너와나와너와나>(2019, 갤러리 기체)와 이어져있다. 공간과 좌대 위에 세워지고 매달려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물 혹은 부스러기들은 하나가 되고자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인의 신체를 떠올린다. 구나는 신체의 겉모습을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신체를 해부하여 시적 언어의 물화를 시도한다. 문학적인 작업 표제가 자아내는 정서는 논리나 개념보다 감각적인 면이 보다 강하게 드러난다. 서양미술사를 따라가다 보면 고전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의 변곡점이 나타나는데, 미술이 시대를 표상하는 기호에서 미술이란 본질을 찾아가는 혹은 발명하는 시기임을 알게 된다. 예술의 기능과 사회적 역할을 차단하고 순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려는 욕망이 폭발하던 이 시기는 언어와 이미지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어긋하게 한다. 이 시기의 미술은 시각적인 것 너머 존재의 진실을 탐구하고자 했다. 구나의 작업은 미니멀리즘과 탈매체라는 정형화된 미술사적 서사와도 어긋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상적 세계를 떠도는 빈곤한 이미지의 변주와 번역이 마치 동시대를 견인하는 미학으로 치부되는 현상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구나가 펼쳐놓은 지칭할 수 없는 것들의 조합은 가장 기초적인 행위들 – 질료들을 편평하게 펴고, 동그랗게 말거나 동그란 또는 네모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구멍을 내거나 도려내어 그것들을 엮고, 서로를 기대어 세우는 – 을 거쳐 시적 장면을 끌어낸다. “이를테면, 작품의 현실에 대한 찬미, 시에 있어서 언어의 리듬의 찬미, 음악에서 소리의 찬미, 회화에서 빛이 된 찬미, 집에 있어서 돌이 된 공간의 찬미가 그것이다.”(모르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323~4쪽) 쌍둥이의 목차는 끊임없이 공명을 만들어낸다. 표제와 작업, 물질과 공간, 너와 나/나와 너 사이의 조응은 영화의 시퀀스가 엮인 것 같은 몽타주 효과를 일으킨다. 굳이 영화적이란 의미를 덧붙일 필요는 없다. 그의 작업은 명시적이지 않고 늘 두루뭉수리하고 비인칭적이며 무엇과 관계된 형용사적 태도를 유지한다. 이는 고정되지 않으면서 늘 상호작용하는 어떤 상태, 성질, 질감에 힘을 싣는다는 걸 의미한다. 쌍둥이의 목차는 이러한 작가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낸 전시임에 틀림없다.
2020
글 / 구나
너는 나의 목소리를, 나는
너의 목소리를 앞에 두고 따라간다. 다툴 시간도 없이 이어지는 느림 속에서 너는 어느 날 빛을 타고
사라진다. 너의 목소리만이 나의 유일한 이유였다. 어쩔 수
없이 당연한 반복은 멈춘다. '몸짓을 시작하자.' 아이보리
계곡에 복숭아뼈가 담긴다. 센티멘탈 로그인, 이제 긴장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너는, 어둠이
드리우자 하야면서도 상큼 드러나는 살구 빛 얼굴로 둥글게 서있다. 나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폭포와
같이 흘러내리며 서있다. '마침내 너와 나는 사이가 생겼구나.' 그
사이는 흐릿하지만 긴장감이 넘쳤고 그것이 서로를 기쁘게 만들었다.
티타임, 서로를 바라보기보다
스스로를 내려 본다. 너는 목 위에 자리 잡은 어깨, 밖으로
향한 곡선의 뼈, 길이가 어중간한 두 팔… 그렇다면 바스락거리는
하얀 언덕, 부서질 것 같은 지진, 에머랄드베이지 물빛… 그 것은 나이다. 헤픈 에러, 너와
나는 또 다른 우리로 풍경이 되어 간다.
'랄라아' 두 목소리로 리듬을 이룬다. '툭툭' 두 몸짓으로 힘을 만든다. 유일한 목소리로 하얀 것을 듣고 유일한
몸짓으로 유약함을 잇는다. 유일한 쌍둥이, 유일한 풍경, 그럼 다시 센티멘탈 로그인.
Follow on
you put in front my voice and I put in front your voice. In a delay without
time to fight, you disappear one day in the light. Your voice was my only
reason. Unavoidably the natural repetition stops. ‘Let's start gesturing.’
Ankle bones are in the ivory valley. Sentimental login, now, with tension.
Thought
that you have disappeared but you are standing round with an apricot light face
that appears to be dark but fresh. I stand with wet hair like a waterfall
flowing down. 'Finally, you and I are formed each other gap.' The between was
blurry but tense, and it pleased each other.
Teatime, we
look down at oneself rather than face each other. You have shoulders on your
neck, curved bones facing out, awkward arms... If so, rustling white hills,
brittle earthquakes, emerald beige water light… It's me. Easily error, you and
I becoming another landscape's ours.
'Lallaa'
Two voices harmonize rhythm. 'TukTuk' create strength with two gestures. Hear
things of white with a singular voice and connect weakness with a singular
gesture. Twins of singular, landscapes of singular, then again, sentimental login.
2019
글 / 손송이(독립기획자)
친애하는 너와 나의 죽음에게
대낮에 긴 잠에서 깨어 주변을 살필 때 세계는 흰빛 속에서
증발하기 직전이었다. 모든 것들이 가볍고 단단했으며 가만히 어떤 질감을 품고 있었다. 혀에는 이미 삼킨 액상형 해열제 맛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마가
끓었고 귀는 먹먹했다. 당신은 침대 위에서 다른 쪽으로 몸을 틀어 뒤척였다. 목소리 위로 이불이 서걱이는 소리가 소복이 덮였다. 조각가는 익숙한
솜씨로 몸의 일부를 잘라냈다. 그 어떤 기척도 없이. 오소소
소름처럼 돋은 파도는 병약한 바다의 것이었다. 멀리서 온 편지에는 작고 예민한 단어들이 나타났다가 이내
흐려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뜬 눈으로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다.
이는 구나의 개인전 《너와나와너와나》(갤러리 기체, 2019.10.31.-11.21.)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떠올렸던 잔상이다. 이 전시에 관해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막막하던 때에도 어떤 구체적인 감각들이
끝내 내 몸에 남아 있었다. 한참 동안 말문을 잃고 그 그림들을 다시 보면서 나는 여러 개의 커튼이
쳐진 긴 통로를 거닐 듯 이 감각들을 거푸 통과해야 했다. 기실 그것들은 작가로부터, 그리고 작가가 우연히 포착한 이미지로부터 옮아온 것이었다. <권진규의
스카프를 맨 여인>에서는 권진규가 제작한 조각 작품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이 전시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이행에 관한 것이다. 전시 제목에서 ‘너’와
‘나’의 접속의 상태가 부각되는 것도 바로 타자와의 상호
관계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런데 ‘나’와 ‘너’는 개별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물질적이고 유한하다. 이 전시를 구성하는 요소 또한 손상되기 쉬운 여러 개의 개별적인
몸이다. 관절 없이 휘어진 긴 ‘뼈’가 바닥에 놓여 있는 <화이트 본>을 따라 관람객의 동선과 주변의 공기, 전시의 신진대사도 한쪽으로
휜다. <화이트 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뼛조각’은 <화이트
본 프롬 어드레스>의 토대를 이룬다. 천사는 누군가의
몸에서 탈각하여 육신처럼 썩고 있다. 여인의 흉상 중 목의 묘사는 작가가 이전에 잘린 스테이크를 그렸던
방식과 흡사하다. <화이트에머랄드블루바다> 앞에는
소거된 얼굴을 지탱하는 참수당한 목이 바닥에 세워져 있고, 마른 입술을 벌리고서 허공에 멍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의 얼굴에는 오래 방치된 식빵에서 피곤 하는 푸른 기가 감돈다. 해변을 걷는 여인의 얼굴은
하얗게 비어 있고 바로 옆에는 그녀의 얼굴을 도려내어 찌푸린 미간 부근만 확대해 놓은 듯한 <오렌지살구햇빛주름>이 걸려있다. 작가에게 바다는 조각난 뼈이고 회화는 그 살점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쇠락할 운명에 갇혀 있다. 그렇기에 “누구라 할 것
없이 (…) 물빛얼굴이 된다.” ‘나’는 어떻든 ‘나’라는 자기동일적인
주체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며 죽음은 그에게 미지의 엔딩으로 주어져 있다. 구나 작가의 몇몇 회화 작업에서
배경이 되는 그리드 혹은 줄무늬는 일견 한계를 내포한 어떤 좌표축처럼 보인다. 우리가 이따금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병상위에벽지”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까닭은 거기서
어떤 분할과 좌표 읽기의 시도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방향을 잃은 삶은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순간을 홀로 견디며 하릴없이 동요하거나 침잠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에머랄드베이지죽음>에서 ‘죽음’이라 칭해지는 무언가는 작은 정방형의 화면 안에서 희미한 구획을 배경으로 웅크린 채 그저 잠자코 있을 따름이다. 가만 보면 그건 마치 아무렇게나 번진 눈물 얼룩 같다.
하지만 ‘너’와 ‘나’ 사이에 넘실거리다
어딘가에 가 닿기도 하는 세계 내 존재들은 우리가 때때로 우리 자신을 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대상의 형태와 맛과 감촉을 온전히 살피고 맛보고 느낌으로써 기꺼이 이 존재들에 참여한다. <화이트블랙돌사이베이지오렌지두눈>을 “마주하며” <브라운그레이블루천>과 “한 몸과도 같이 포옹” 하면서
타자에 스며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 스며든 타자를 본다. 또, <잿빛오렌지올리브굴>이 입속에서 내는 비린 향과 맛, 차가운 온도, 물컹거리는 촉감 때문에 “서둘러 삼켜야 할까” 고민하기도 한다. 존재들이 우리 눈앞에서 일렁이며 조용히 죽어가는 것을 목도할 때, 그러할
때, 이 세계는 슬프고도 신비롭다. 태연하게 고통스럽다. 비칠거리는 연약한 마음으로 내가 다시 나 자신이어도 괜찮을 것만 같다.
그렇게 다시 “착장”한 마음으로 <너와나와너와나>에
묘사된 인물들은 병원을 연상시키는 화이트큐브 안에서 창백한 흰 조명을 받으며 자신과 같아질 수 없는, 전적으로
낯선 타인에게 자신의 입을 맞춘다. 그들은 서로에게 건네는 떨리는 입술에서, 그리고 그 입술이 닿은 자리에 남은 미지근한 온기에서 문득 어떤 의미를 찾아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김현의 시 「애정만세」에는 이 순간을 그려내는 몇 구절이 있다. “나는
빛과 함께 침대 위에서 세계 속 미스터리를 본다. 빛의 얼굴은 잘생겼다. 눈과 코가 무엇보다 입이 있으므로. 뽀뽀를 한다. 뽀뽀할 때마다 빛의 얼굴은 변한다.”
그런데 이 빛의 얼굴은 산산조각 난 채로 서로 붙어 있다. 구나 작가는 섬광이 가닿는 면면의
경계를 제법 선명하게 그려내면서, 통각을 지닌 그들이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2019
글 / 조재연(미술비평가)
시계판에 총
1
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타임 세일이라는 행사 속에 종사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소실하는 일은 '지금'이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항 사이에서 도려낼 때 야기된다. 시간은
모순적인 관계항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재를 따로 도려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하긴커녕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에 연루하게 된다. 과거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이후'―80년 5월 이후나
14년 4월 이후와 같은―라는 기준점을 가지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지양이라는 관계에서 위치한다. 반면 미래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현재에 존재해야 했으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지양을 수행하는 관계에 놓인다.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항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달랐고 또 미래에 역시 달라질 것이란 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견지하는 일이며, 존재에게는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에 믿음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빈 도시에서 폐허의 모습이 드러남을 발견하고, 스미스슨은
막 탄생한 건축물이 처음부터 폐허로서 건설되는 것임을 느낀다. 그때 이러한 시각들은 여전히 사상思想으로서 시간이 존재할 때
작동되는 것이다. 시대가 견고한 고체처럼 언제까지 지속될 때―비판이
있을 때조차 오히려 그 비판을 견디는 견고함을 증명할 때― 사상으로서의 시간은 그 견고함이 얼마나 물렁물렁한지를
계시한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거나 견고하든 산맥은 시간 위에서 물렁물렁한 법이다. 그리고 시간이 존재의 태도하고는 어떤 상관도 없이 흐를 것이란 사유하고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현재를 사는 이에게, 어제도 내일도 다 같은 오늘이거나 현재일 뿐인
그에게, 시대는 어떤 것보다 견고하고 영원하다. 시대가 고정된
것이라면 존재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편에 서거나 무엇도 할 필요가 없는 편에 서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이처럼 모순적인 시간 위에서 시대는 늘 견고함을 무릅쓰고 녹아내리는 것이 된다. 그럴 때 비판은
가치를 가지게 되며, 존재는 시대의 반영물을 초과해 시대의 형성에 참전하는 주체로서 역능을 가질 수
있다.
지금의 시간을 따돌리며 사적史的인 시간을 가지는 것은 고체로서의 시대에 그것의 본성일 융해성을 다시 확인하는 일과 동조하며, 이는 다시 그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존재의 역능을 확약하는 것으로서 삼위三位를 이룬다. 그리고 '지금'의 시간만이
부유하고 있거나 '시간'없음의 세계에서, 예술은 시간에 대적함으로써 시간을 수복하는 일에 나선다. 그것은
일반적이지만 귀중한 의미로 예술이, 과거나 현재에 허용된 가능한 것들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위반적인 상상이며 미래에 도래할 것을 앞당기는 것을 통해 시간의 형성으로서 대적에 헌신해온
까닭이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천박한 예술이 그 사소함만으로도 비판일 수 있었던 배후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에 활약하는 예술들이 '동시대 예술(미술)'이기를 자처할 때 '동시대'라는 낱말은 '현재를 살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늘 의심스럽다. 내일도, 모레도 동시대일
그곳에 미래란 시간은 도대체 있을까. 하나같이 미래를 보거나 미래에서 온 것임을 주장했던 예술은 왜
소박하게도 오늘에 정착하고 말았는가. 다시 말해서, '지금'의 시간에 대적하는 예술이야말로 비판의 전승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즉 그것만으로는 삼위 중 하나를 놓친다. 예술은
시간을 전제하고, 비판으로서 미래를 그리는 것과 더불어 시대가 융해적인 것임을, 그래서 거꾸러질 수 있는 것임을 밝혀야 한다. 이는 사물이, 존재가, 그래서 세계가 발생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나의 『너와나와너와나』(갤러리 기체, 2019.10.31-11.21)는 그런 한에서 시간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준다. 작업은 시간을 대적하기 위해 발생에 관한 것이 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전까지 주목받던 것은 '그것'이 어떤 정체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전시는 '그것'을 감히 고정시키거나 추정하지 않는다. 진실은 정지된 순간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인 까닭이다. 즉 전시는
그것이 '발생'했거나 여전히 발생하는 중이며 발생할 것임을
보이려 한다. 그렇게 『너와나와너와나』에서 세계는 녹아내린다.
2
그렇다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미술은 어떻게 시간을 상수로 함유할 수 있는가.
가령 원을 규정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일정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정한 점을 원점으로 하여 선분 AB를 평면상에 회전시켜 만들어진 닫힌곡선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원이 지금 드러난 그대로의 순간에 대한 정의라 한다면 후자는 원의 발생에 대한 정의이다. 원이 순간에
의해서 규정될 때 그것은 정지된 형태만을 드러내지만, 발생에 의해서 규정될 때 원은 존재가 파악하기
전에는 무엇이었는지(선분), 파악한 와중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회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무엇이 될지(멈출지, 확장될지 혹은 변용될지 등)
사유하게 만든다. 정의가 순간에 대한 것을 가리킬 때 그것이 전제하는 것은 (순간의)영원성이거나 '지금
여기'로만 환원될 수 있는 편협한 모든 것이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발생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일은 그것이 과거와 미래를 소유한 대상이라는
것은 물론, 그것이 원이 될 수 있었던 것만큼 다른 것도 될 수 있다는 잠재적인 역능을 확인한다.
'너와나와너와나'라는 제목은
어떠한 서사를 담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발생적인 규정을 함축하고 있다. '너'와 '나'의 교착은 '우리'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두 번을 교착하고서도 끝끝내 '우리'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원이 어떤 선분의 회전의 발생이듯 '우리'를 발생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교차의 발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너와 나를
한꺼번에 가리키는 대명사'라 표현하는 것은 순간에 대한 정의이다. 반면, '우리'가 '너와나와너와나'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한 발생적 정의이다. 의미는 '우리'가 되기 전에 '너'가
있었고 '나'가 있었던 과거로부터 질주해 온다.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가 교착하는 것을 정지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와(and)'로 반복해 발생시킨다.
질주는 계속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지금은 '우리'일지라도 과거에선 잠재적으로 '너'와 '나'였으며, 미래에도 '우리'라는 대명사만으로 고착되지 않을 것임을 제목은 알린다. 전시는 이렇게 시간의 장에 문을 두드린다.
「화이트 본 프롬 어드레스」의 집게 발을 지닌 '게'는 어딘가로 떠나려 하거나 도착하고 있다. 그는 여행지를 향해 갈
것이기 때문에 여객에 대한 안내문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혹은 도착했기 때문에 그 글과는 떨어져 있는데―, 그것이 그가 어딘가로부터 이동하려는 상태이며―혹은 도착한 상태이며― 적어도 고정되거나 정착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떠나온 과거의 시간과 떠나갈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보여준다. 즉 '지금
여기'에 현재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가 상존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게'가, 이동과 도착이라는, 서로를 지양하는 것에 대해서 동시에 말하는 것은 작업이 상대하는 시간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게가 존재하는 곳은 모래사장도 아니고 수중도 아니다. 게는
그 둘 중 어느 한 곳에 있어야만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의 지점에서 작업은 되묻는다. 어째서 게가 도착한 나무판자와 종이가 모래와 물이 아니란 말인가. 판자와
종이가 여기까지 오는데 한 방울의 물이나 한 줌의 모래도 들어가지 않았는가, 혹은 판자와 종이가 지나치게
긴 미래에서 거대한 물줄기와 모래에 잠길 잠재성은 결코 부재하는가. 작업은 답하고 있다. 현재만을 부유하는 존재에게 작업은 이질적이지만 시간을 가진 존재에게 이 모습은 당위적이거나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전시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오거나, 오랜 시간을 떠밀어
가는 것으로써 '판자와 종이'가 '모래와 물'에 상반되지만 동일한 것임을, 현재의 견고한 시대란 그렇게 녹아내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업이
멈춰져 있지만 발생한다는 것과 발생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시간을 전제하는 것 안에서 「긴목」의 좌대와 같은 모양의 조각, 그
위의 단풍, 단풍에 연결된 머리칼과 가는 철사 역시 하나의 완벽하고 온전한 나무일 수 있다. 도무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강하게 부착되거나 연결되지도 않은
것들은 파편을 이루기는커녕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동일하다고 말하거나 하나인 것이라 강하게 주장한다. 긴
시간 위에서 조각은 좌대가 아닌 줄기일 수 있으며 철사는 가지가, 머리칼은 그것에 걸린 구름일 수 있다. 인간이 애써 만든 오늘에 강하게 굳어진 것처럼 보이는 문명은 시간을 대적할 때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연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허무섞인 물음에 부정할 수 없는 긍정으로
기대와 지지를 보낸다. 이러한 측면은 「화이트 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할 것이다. 전시 공간이란 신체의 장에서, 그것은 온전한 '뼈'이다. 그것은 당장은 '뼈'가 아니지만 먼 과거로부터 도착한 뼈이거나 먼 미래에 뼈로 도착할
조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화이트 본'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순한 기하학적 조형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전시에서
작업은 항상 발생적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시간을 염두에 놓고는 '뼈'인 것에서 '뼈가 아닌 것'으로
발생하고 있거나 '뼈가 아닌 것'에서 '뼈'로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설치에 해당하는 세 작업은, 이질적인 것이 어떻게 하나의 구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시간에 대적한다. 한편에 회화로 전개된 작업은 하나에로
결합이라는 구성이 아니라 변용이라는 서사로 시간에 대적한다. 우리는 기어코 「권진규의 스카프를 맨 여인」, 「물빛얼굴」, 「화이트블랙돌사이베이지오렌지두눈」, 「너와나와너와나」, 「무제」 그리고 「엔젤」에서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고자
할 것이다. 심지어 가장 인간의 형상과 멀어보이는 「에메랄드베이지죽음」에서조차 인간 신체의 형상을 발견하고자
주선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상용 수석壽石에서 인간의 형상을 추출하는 것만큼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보다 바위의 단면이나 물결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편에서 더 많은 단서와 단단한 증거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회화들이 구획된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의 평면으로 수렴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위에서라면 어떤 서사로 이해될 수 있다. 살아가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외부와 맞서거나 패하는 발생의 연속이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공간 위에 덩그러니 놓인 늘 같은 덩어리일 뿐이다. 현재라는
시간만 있다면 인간은 덩어리 존재로 전락한다. 그 신세는 그저 주어진 변함을 체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내맡길 뿐이다. 그런 이해로는 그가 과거를 견뎌왔을,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질 역능을 감지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그
역능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발생적인 표면에서다.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은 시대 안에서 살아가면서
여러 힘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사소하게는 중력의 힘일 것이고 거창하게는 사회의 통제일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주체는 스스로의 형상을 빼앗기고 있으나 완강하게 버티고 있고,
빼앗겼으나 자신의 본질을 비판이라는 실천을 통해 되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회화
속의 동학動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인 인간들이 아니라 삶을 되찾고 있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어쩌면 그저 '현재'라는 상황 속에 흡수되고 있지만 완강히
버티고 있으며, 이미 흡수되어 상황과 분리되지 않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맞서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바위나 물결 속으로 사라져가나 인간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고수하고 있으며, 이미 바위나 물결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다시 상기하자. 지금의 시간을 따돌리며 사적인 시간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 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시대의 본질을 재발명하는 것, 결국 그 변혁을 가능하게끔 하는 존재의 역능을 확약하는 것으로서 일체一體의 삼위가 존재한다. 언급한 작업들에서도 또 그렇지 않은 작업들에서도 전시는, 미술이
시간예술이 아니라는 일반론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것은 전시가 시간이 아니라면, 발생론적인 관점이 아니라면, 이해될 수 없는 까닭이다. 현재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재고하는 모순적인 시간의 관계항 속에서야
의미를 쟁취한다. 그것은 현재의 견고함을 무릅쓰고 시대와 세계가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존재가 그것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주체가 될 수 없다면,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할 것이라는 포고에 가깝다. 극복해낸 과거와, 현재를
다시 극복해낼 미래를 모르는 근대인은 단지 오늘이라는 현재와 싸우는 데 일생을 보낸다. 지금의 많은
예술들이 현재의 의미를 찾고자 거대 서사와는 거리를 두고 사소한 것에 머무르거나, 과거와 미래에 연연해하지
않는 소박한 행복을 발견하는 데 종용하는 것은, 또 그렇지 못해 신경쇠약에 시달리거나 신경증에 걸린
존재가 과거의 영웅을 대체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러나 전시는 우리가 그런 세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 현재의 존재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이미 과거를 극복해낸 주체들이며, 이미 미래에 맞서있다. 지금의 인간이, 어느 순간에 우리의 시간이 과거와 미래에 걸터있다는 것을 망각하거나 포기했다 하더라도 예술은 그것보다 먼저
가 시간에 대적하려 한다. 인간이 재발명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직 남아있는 까닭일 것이다.
3
작업 노트에 구나는 전시가 방황의 과정을 드러내도록 했다고 적는다. 방황이
부정적인 것으로 다뤄지는 세태에서 그는 "우리의 방황들이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섞여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두 명제를 떠올렸다. 톨킨은 1954년에 "방황하는
자가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1973년에 라캉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적어도 『너와나와너와나』 이후라면 우리는 이 명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현재'에 머무는, 정지의
순간에 고착된 존재는 태양이 자글자글 끓다가 사라질 것임을, 산맥이 물러 대지와 공평한 높이가 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매번의 목격은 매번 다름을
반복하는 것"(작업 노트)임을 알지 못한다. 그는 시대와 사물들이 녹아 내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해는 '현재'라는 시간에 납치된 감각이
인간을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적하는 자는 속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이 때문에 방황할 것이다. 시대와 사물이 녹아내린다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언가 배워야만 하고 현재와 싸우는 것을 통해 미래를 직접 걸어야만
한다. 전시에는 인간 이전―이후―의 인간을 보는, 시간 이후―이전―의 시간을 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구나가 모든 "타자와 주체 사이의 틈을 열어 서로의 불완전함을 매번 목격하는"
것이 "여는 구조"(작업 노트)를 위함이라고 했을 때 나 역시 그 불완전함에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섞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때 그 불완전함은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고정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는 불완전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말대로 닫힌 구조를 연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있다. "누가 믿을 것인가! 사람들 말로는 시간에 격분하여 새 여호수아들이 모든 시계탑 밑에서 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이 문장은 7월 혁명의 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이 문장을 쓴 이유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항을 만드려는 시도를 부인하기 위해서였다. 과거가 아닌, 미래는 더더욱 아닌,
메시아가 현현하고 있는 현재에 정지시켜 사유하고 실천하기 위해 새 여호수아들은 시계판에 총을 쏜다.
그러나 오늘이 혁명의 날이 아니라면, 메시아가 현현하지 않은 시간이라면, 정지된 시침은 다시 발생의 장으로 되돌려져야만 한다. 심지어 혁명의
날에도 혁명은 도래해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니 '오늘'만을 아는 시간에 대적해야만 한다. '현재'의 시간에 격분하여 새 여호수아들은 모든 시계탑 밑에서 지금을 따돌리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야 할 것이다. 그것으로 시침은 움직일 터이다.
2019
글 / 구나
화이트블랙돌사이베이지오렌지두눈을 마주한다.
눈 그늘 아래 오렌지살구햇빛주름으로 시선을 흘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는 물빛얼굴이 된다.
문득 병상위에벽지가 우리의 얼굴과도 같았던 것 같다.
우리는 브라운그레이블루천과 한 몸과도 같이 포옹을 한다.
에머랄드베이지죽음… 꿈을 이어나가야지.
넘실거리는 화이트에머랄드블루바다, 바닷물과 포말이 흐려지고 다시금 선명해진다.
입에 담긴 잿빛오렌지올리브굴,
서둘러 삼켜야할까.
우리는 예전보다 조금 휘어진 하얀뼈로 착장한다.
바닷물과 포말이 또다시 흐려지다 선명해질 즈음 뼛조각으로 변신을 이룬다.
“다시 두 눈을 마주하자.” 눈을
깜빡, 돌아갈 주소를 떠올리며 동시에 지워나간다.
Face each other to BeigeOrangeEyesBetweenWhiteBlackStone.
Drop eyes on OrangeApricotSunlightWrinkle
under the eyes shade.
No matter who we
are, we become watery face.
Suddenly wallpaper
on sickbed looks like our face.
We embrace like one body with BrownGrayBlueFabric.
EmeraldBeigeDeath…
will keep on dreaming.
WhiteEmeraldBlueSea
surging, Seawater and foam become cloudy and clear again.
GrayOrangeOliveOyster
in the mouth, Should we hurry to gulp?
We wear white
bones that are slightly curved than before.
Seawater and
foam become cloudy and clear again, turning into bone fragment.
"Let's face
each other again." blinking eyes, Remember address at go back and erase it
at the same time.
2018
글 / 정현(미술비평가)